원래 의학은 단순한 경험 지식에서 출발했다. 고대 그리스의 히포크라테스 시대에 와서 의학은 처음으로 합리적 철학, 즉 과학과 결합하기 시작했다. 의학이 과학과 연결되며 의사들의 사회적 처우에도 변화가 생겼다. 중세 대학에서 내과의들은 교수로 자리를 잡으며 사회적 신분이 상승했다. 당시 의학은 병에 대한 관찰 위주의 처방이 대부분이었고, 의학 지식으로 병을 실제로 치료할 수 있었던 예는 많지 않았다. 19세기까지도 사람들은 인간의 병에 대해 의사의 처방보다는 자연이 치유한다고 생각했다. 전염병이 창궐하던 시기에도 의사들이 할 수 있었던 것은 환자들을 격리하거나 위로하는 정도가 대부분이었다.

  요즈음 성형외과 의사들이 높은 대접을 받고 있지만 본래 외과의의 사회적 지위는 매우 열악했다. 히포크라테스 선서에서도 의사들은 수술을 직접 하지 말고 칼을 잡는 일은 외과 의사에게 맡기라고 지시하고 있다. 중세 유럽에서는 이발사가 외과의도 겸하고 있었다. 흑사병 시대를 거치고 군대에서 수술의 중요성이 인정되면서 이발사-외과의의 사회적 인식이 높아졌다. 더욱이 베살리우스가 근대 해부학 시대를 열면서 외과 의사는 인체에 대한 체계적인 해부학적 지식도 얻게 됐다. 하지만 아직 감염에 대한 이해가 부족해 인체 해부는 사망으로 이어지는 경우가 많았다. 또한 깨어 있는 상태로 시술을 해서 외과 병원의 시술 현장은 그야말로 아비규환이었다.

  콜레주 드 프랑스의 교수였던 프랑수와 마장젠은 역사상 최초로 실험생리학 분야의 실험실을 운영한 사람이다. 그의 학생이자 후임이었던 클로드 베르나르는 생리학, 병리학, 약리학에 대한 융합 연구를 통해 실험의학이라는 새로운 분야를 확립했다. 실험의학의 등장은 의학과 과학의 결합을 가져온 혁신적인 사건이었다. 다양한 백신을 개발한 파스퇴르도 파리고등사범학교 출신의 화학자였다. 그는 발효 현상을 미생물에 의해 설명하고 저온살균법을 창안하는 등 미생물학이라는 새로운 학문 전통을 세웠다. 화학자 출신임에도 불구하고 그는 닭콜레라, 광견병, 탄저병 등 수많은 질병의 백신을 개발하여 인류가 질병을 극복하는 데 공헌했다. 그가 설립한 파스퇴르 연구소는 백신을 비롯한 의학 연구 분야에서 세계적인 중심지가 됐다.

  의학 분야에 과학 지식이 도입되면서 의학이 체계화된 것은 물론 의사들에 대한 사회적 신뢰도가 향상되고 점점 더 높은 권위를 유지할 수 있게 됐다. 1846년부터 빈 의과대학 종합병원에서 근무하던 제멜바이즈는 임상 실험을 통해 감염에 대한 새로운 이해를 얻을 수 있었다. 글래스고의 조지프 리스터는 파스퇴르가 창안한 세균 이론을 바탕으로 1865년 석탄산 살균법을 발견할 수 있었다. 살균제와 마취제의 도입으로 외과 시술 분야는 새로운 혁신의 시대를 맞이했다. 베를린 대학의 생물학자 요하네스 뮐러에게 배웠던 헬름홀츠는 본래 군의관을 지낸 의사였다. 하지만 그는 실험생리학, 근육 운동, 생리광학 및 음성학, 역학, 전자기학 연구 등 다양한 분야에서 활동했다. 하이델베르크 대학 시절 그는 생리화학을 연구했고, 우리에게 잘 알려진 에너지보존법칙(1847)도 이때 나왔다. 헬름홀츠는 나중에 베를린 대학 물리학과 학과장이 되어 독일 제국의 물리학 수상으로 일컬어지게 되는 데 전형적인 의사-과학자의 원조였다. 과학과 의학의 결합을 통해 의사들에 대한 사회적 신뢰도가 향상됨은 물론 사회로부터의 금전적 보상도 커졌다. 현대 의학 분야에서 의사들이 엄청난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었던 것은 마취 및 소독제의 등장, 생리화학 및 생화학, 분자생물학의 발전, X-ray, CT, fMRI를 비롯한 장비의 혁신 등도 커다란 역할을 했다. 현대적 병원 제도와 전문적인 의사 집단의 등장은 의료와 과학기술의 결합을 통해 이뤄졌다.

요즈음 바이오 및 보건의료 산업이 급성장하면서 의사과학자 양성을 비롯해서 의학 교육 혁신이 시대적으로 요구되고 있다. 이런 추세에 부응해 우리대학은 2023년 신입생 선발을 목표로 의과학 전공 과정을 신설함으로써 재생의학 및 줄기세포, 신약 개발, 감염 및 면역 질환, 의료기기 및 첨단 의료 장비 개발을 체계적으로 수행하려고 한다. 의사과학자 과정(MD-PhD)은 더 이상 의과대학의 전유물이 아니며 첨단 공과대학과 의과대학의 결합은 시대적인 요구가 된 것이다. 

(출처: 포항공대신문 제430호 사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