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chool of Convergence
Science and Technology
최형섭 서울과학기술대융합교양학부교수·‘아메리칸 프로메테우스’ 번역자
원자폭탄 개발을 위한 ‘맨해튼 프로젝트’를 이끈 물리학자 로버트 오펜하이머. 동아일보DB
《영화 ‘오펜하이머’ 개봉은 원자폭탄 개발 과정에 대한 정보가 대중적으로 알려지는 계기가 되었다. 영화 중반부에 뉴멕시코 사막에서 원자폭탄을 개발하기 위한 비밀 연구소가 설치된 후 첫 핵실험에 도달하기까지의 과정은 그야말로 과학계의 ‘어벤저스’ 군단이 지구를 구하는 모습처럼 그려진다. 제2차 세계대전 중에 원자폭탄을 만들기 위해 노력을 기울인 것은 미국만이 아니었다.》
1938년에 독일 물리학자 오토 한이 핵분열 현상을 발견하자, 이를 무기로 만들기 위한 노력이 독일에서 시작되었다. 미국의 맨해튼 프로젝트보다 몇 년 앞선 일이었다. ‘우란프로옉트(Uranprojekt)’로 알려진 독일의 핵무기 개발의 리더는 베르너 하이젠베르크였다. 나치 독일은 전쟁 기간 동안 상당한 노력을 기울였으나 결국은 중수(重水) 등 핵심 자원의 부족으로 기초적인 단계를 벗어나지 못한 채 종전을 맞고 말았다.
이렇게 1938년 이후 핵분열 현상의 과학적 원리에 대해 여러 나라의 물리학자들이 기본적인 이해를 갖추고 있던 상황에서 미국만이 원자폭탄 개발에 성공한 요인은 두 가지로 나누어 생각할 수 있다.
먼저 미국 본토는 2차 세계대전의 전장에서 비켜나 있었다는 점을 들 수 있다. 따라서 미국이 보유한 막대한 산업적 역량을 원자폭탄에 사용될 핵연료 제조에 투입할 수 있었다. 예를 들어, 우라늄 농축을 위해 건설된 오크리지 설비는 테네시강 유역 개발공사(TVA) 수력발전소에서 생산하는 막대한 전력을 활용하는, 당시로서는 세계 최대 면적의 공장이기도 했다.
둘째, 오펜하이머라는 걸출한 인물의 리더십 역시 중요한 요인이었다. 그는 물리학자로서도 탁월한 업적을 남겼지만, 다양한 분야의 전문가들의 이야기를 듣고 핵심을 파악한 후 다음 단계의 연구를 기획하는 데 있어서 뛰어난 재능을 가진 인물이었다. 공산주의 활동 전력에도 불구하고 그가 맨해튼 프로젝트의 과학 총책임자로 발탁된 것도 이런 이유 때문이었다. 결국 다양한 분야의 전문성을 섭렵할 수 있는 탁월한 프로젝트 관리자가 막힘없이 일할 수 있도록 미국 연방정부가 전 국가적 산업 역량을 총동원해 준 것이 맨해튼 프로젝트 성공의 비밀이었다.
미국이 제2차 세계대전 중 일본 히로시마에 투하한 원자폭탄 ‘리틀보이’.
미국은 당대 최고의 과학자, 기술자들을 모아 전폭적으로 지원했고, 원자폭탄 개발에 가장 먼저 성공했다. 동아일보DB
하지만 당연하게도 원자폭탄 개발은 오펜하이머 혼자서 이룬 일이 아니었다. 영화에서 ‘어벤저스’처럼 등장하는 이지도어 라비, 한스 베테, 엔리코 페르미, 에드워드 텔러, 리처드 파인먼 등 천재 물리학자들만의 업적도 아니다.
잘 알려져 있듯이 원자폭탄을 가능하게 한 과학적 원리는 1920년대 이후 물리학에 등장한 ‘새로운 물리학’, 즉 양자역학에 기반을 두고 있다. 하지만 원리만 가지고 폭탄을 만들 수는 없는 노릇이다. 적절한 순간에 핵분열 연쇄 반응이 일어나도록 폭탄을 설계해야 하고, 그것을 정교한 공학적 ‘장치’로 구현해야 하며, 무엇보다도 연쇄 반응을 일으키는 성질을 가진 방사성 물질을 확보해야 가능한 일이다. 즉, 맨해튼 프로젝트의 성공은 물리학자와 화학자, 폭약 전문가와 화학 공정 엔지니어를 비롯한 다양한 분야의 전문가들이 협업한 ‘융합’ 프로젝트였기 때문이다.
당시 이 프로젝트에 참여했던 한 기술자가 로스앨러모스 실험실에서 이온 가속장치를 살피고 있다. 사진 출처 미국 프린스턴대 홈페이지
이런 융합 프로젝트가 가능했던 것은 국가의 전폭적 지원 때문이다. 불과 몇 년 만에 이론가들이 머릿속에서나 상상하던 무기를 실현해낸 맨해튼 프로젝트는 국가 주도의 과학 프로젝트의 대표적인 성공 사례로 꼽힌다. 이후 미국 안팎에서 해결하기 어려운 문제에 봉착할 때마다 ‘맨해튼 프로젝트식’의 대응을 요구하는 것이 유행하기도 했다.
우리가 직면한 문제가 얼마나 많은가? 1970년대 이래 인류는 암을 정복하고 에이즈 치료제를 개발하며, 태양 에너지와 핵융합 발전을 통해 에너지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함으로써 기후변화에 대응하고, 사이버 보안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또 하나의 맨해튼 프로젝트’를 추진해야 한다고 끊임없이 주장해 왔다. 이러한 주장이 기대하는 바는 국가 기구의 전폭적인 지원을 바탕으로 자원을 총동원해 최첨단 과학과 기술을 이용한 해결책을 모색할 수 있도록 해 달라는 것이다. 과학자들에게 가장 이상적인 작업 환경을 만들어 달라는 요구이다.
그렇다고 해서 듣기 좋은 구호로 ‘융합’이라는 기치를 내걸고 ‘융합을 위한 융합’만을 추구하는 것 역시 문제적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맨해튼 프로젝트식’으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우선 한국 사회가 해결해야 할 문제의 좌표를 명확하게 설정하는 작업으로부터 시작해야 한다. 나아가 설정된 문제가 정말로 시급하게 해결되어야 한다는 사회적 합의를 도출할 필요가 있다. 이런 정도의 정당성이 확보되지 않은 상태에서 국가의 전폭적인 지원을 기대할 수 없는 노릇이 아닌가.
출처: 동아일보 (2023. 09. 08)